mojiseoul(모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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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와 국경을 통해서 국가의 주권을 얻을 수 있다.

정치적 조직은 읽기만 함.

좌측이 좀 물질 적인 것 EX) 영토

우측이 좀 추상적인 것.

국민이나 이런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선택으로 생긴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같이 살고자 해야하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국민은 전통의 발명에 기초한다. 전통의 발명의 예시는 음식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음식역사 김치는 사실 엄청 오래된 게 아니라, 20세기 부터 많이 바뀌었다. 전통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바뀌면서 생기게 된다. 

국민의 토대. 상상된 공동체. 루이14세가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쳤다. 

루이14세는 개인통치의 시초. "짐이 곧 국가다." 이 말은 루이 14세의 정치관을 요약해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왕권신수설 = 왕의 권력은 신에게 받은 권력이다.

국민과 국가의 중앙집권화 = 세금 관련된것은 전부 수도에서 운영한다.

궁정사회 = 귀족이면 시골에 있는 성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서 왕 주변에 살아야 했다. EX) 베르사유궁전

태양왕 = 루이14세는 자기가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무대에 직접오르기도 했다. 

구두 = 무용용 구두

취하고 있는 자세 = 보통 왕이 취하는 정자세가 아니라 춤출 때 하는 자세. 

- 정치를 쇼처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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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종교전쟁 때문에 유럽에서는 큰 변화가 생김. 프랑스는 낭뜨 지역이 평화가 되었지만 아까 말했듯이 중앙유럽상황을 보면 아주 복잡한 상황이다. 여기있는 지도를 보면 1648년 전이다. 17세기 초기의 유럽의 상황이다. 파란색은 프랑스이고 빨간색은 스페인 제국 관련 영토들이다. 이탈리아남부 시칠리아 등등. 이 제국에서는 몇백개의 조그만 국가들이있다. 이 국가에는 새로운 황제들이 있는데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야 할 때는 왕과 왕자들이 다 모아서 새로운 황제를 투표로 선출한다. 그러면 일단은 아주 왕정체제는 아니라고 볼 수 있고 이 새로운 황제의 왕관을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싸우기도 하고 16세기 중반 부터는 이지역에서는 종교 때문에 내란들이 많이 발생했다. 이 지역에서는 종교전쟁에다가 또 정치적인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서 정치적인 전쟁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지역의 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

    그래서 특히 이 지역에서는 지도를 보면 아주 조그만 국가들이 여러개 있어서 국가들이 독립적으로 자체적으로 운영하면서 동시에 제국을 가지고 있어서 애매했다. 이런 여러가지 아주 다양한 조그만 국가들을 통합하고 다같이 한 제국에서 통치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종교 갈등 때문에 이 신성 서로마 제국에 있었던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조약들이 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끝낼 수 있었다. 프랑스같은 경우에는 유럽에서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바로 옆에 있던 신성 로마제국이 전쟁 때문에 약화 되어서 점점 프랑스 왕의 권력이 많이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7세기 후반 부터는 루이 14세가 왕이 되어서 프랑스를 오랬동안 통치했다. 5살에 왕이 되었다. 18살이 되었을 때는 직접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650년대 말 1660년 초에. 그 때부터 루이14세가 프랑스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1715년 까지 살았으며, 1643년 부터 1715년 죽을 때 까지 72년이었다. 그래서 이 왕을 통해서 프랑스의 전체적인 모습이 많이 변했다고 볼 수 있고 이 왕은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의 영토를 지정했다. 지도를 보면 루이14세 부터는 현 프랑스의 모습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녹색부분은 루이14세가 전쟁을 통해서 얻었던 새로운 지역들이다. 유럽에서 이런 중요한 지위를 가진 프랑스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루이14세부터는 다른 유럽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온 유럽은 파리를 쳐다보며 프랑스사람들이 어떻게 살고있는지, 행동하고 있는지 프랑스의 유행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루이14세는 절대주의(absolutisme)의 대표적인 군주이다.

    절대주의란? 절대주의의 뿌리는 17세기 초반부터 생겼다. 17세기 초반에는 다양한 국가들이 조그맣게 존재해서 아주 복잡했다. 원래 신성로마제국은 합스부르크왕조였다. 그 때부터는 종교전쟁 때문에 이 왕조가 많이 약화 되었고 점점 이 나라의 다양성이 약점이 되었다.

    프랑스는 점점 중앙집권화가 되어서 중앙집권화가 전혀안된 국가들은 통치하기 어렵고 경제도 어렵고 법률도 통일 시키기 어렵고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서 나라를 발전시키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날 때는 베스트팔렌 조약들을 통해서 1648년에 전쟁을 끝내고 국가들은 이 신성서로마제국을 구성하는 350개의 국가들은 전부 독립성을 인정 받았다. 왜냐하면 각 국가마다 자기의 자치성, 독립성을 유지하고 싶어서 특히 종교를 위해서 어떤나라는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 사람들이니까 천주교를 지지하고 싶고 옆에있는 나라는 조금 더 프로테스탄트인 나라가 있어서 국가의 종교를 개신교로 하고 싶고 같은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신성서로마제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들의 독립성을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베스트팔렌 조약을 준비했을 때 법적으로 국가라는 것을 잘 정의해야 했엇다. 17세기 초 까지는 국가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고정된 개념은 아니었다. 국가는 영토와 관련된 것인데 이 개념에는 중요한 것이 국경이다, 그 때까지는 국경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까지 유연한 개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국경들이 너무 자주 바뀌니까 국경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벽으로 라인으로 선으로 지시된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정확한 지도도 없었고 그래서 국경이라는 개념이 애매했는데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현대적인 국가의 개념들이 많이 잡혔다. 국가는 국경있는 영토, 땅 그 나라에서 사는사람들 종교 등을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같은 것은 중요한 이야기니까 이 국가에 대해 얘기할 때 그것까지 포함해야 되었다. 그래서 점점 새로생긴 개념이 뭐냐면 바로 "국민국가"이다.

    국가 + 국민 = 그사람들이 지니는 새로운 nationstate라는 개념이 발생. 정치학을 공부하면 보통 역사학자들이 현대적인 서양식 국민국가라는 것이 이 베스트팔렌 조약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억할 만한 연도이다.(1648년_매우중요)

    17세기 부터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간에 여러가지 갈등 전쟁들이 발생했다고 볼 수있다. 20세기 부터 이 국민국가개념이 비판을 많이 받아서 초국가주의, 국가를넘어가는 개념이 생기면서 transnationalisme 이라는 것이 생겨서 새로운 개념을 대신해 발명해야 한다는 경향이 생겼다.

    옆 나라들이 약화 되어서 프랑스는 점점 절대주의를 이루게 되고 정치적인 우월이 시작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국가란? 현대적인국가, 예전에도 국가들은 있었지만, state 라는 단어도 있었지만 말의 의미가 달랐다. 보통 나라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state는 조금 더 법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국가는 역사적인 구성된 것이다. 즉, 언제나 예전에 과거에 있었던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야한다. State가 없는 국민들이 많았고 여전히 존재한다. 국가라는 것은 필수적인 의무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것을 구성이라고 한다. 역사가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이 현대적인 서부의 state국가는 봉건시대에 기원한다. 중세시대 프랑스 같은경우는 프랑스는 단지 모자이크 같은 여러가지 공작,백작같이 지배하는 땅이 많았고 왕이 가지고 있는 땅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의 state는 군주제였다. 왕이 너무약하고 왕아래의 봉신들이 왕보다 더 부유하고 권력도 많고 군대도 있고하니까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없었다. 그러나 12세기 부터는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안할 때는 동맹을 통해서 동맹은 보통 결혼, 다른나라의 왕의 딸들과 결혼해서 동맹을 맺는 것이다. 프랑스는 어떤 봉신의 영토를 정복하면 그 아래에 공작의 땅을 두면 바로 왕실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

    동맹은 버건디 지방을 잘 기억. 물론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몇세기가 걸렸다. 점진적으로 되는 것은 독점화, 모노폴리이다. 한기구가 한 군주가 모든 권력들을 가지는 것이다. 독점이란 왕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세금을 수입한다. 그래서 세금을 통해서 돈을 벌어서 전쟁을 할 수 있다. 왕들이 이 세금을 수익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수단으로 발견해서 나머지 봉신들이 이런 세금을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이것은 왕의 독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을 위해서 군사가 필요하다. 병사도 필요하고, 그래서 군사라는 것도 왕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점점 왕이 필요로하는 군사 군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금을 통해서 군사 지원하고 이것도 왕의 독점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전쟁하기 위해서 세금을 받아야하는데 그러나 세금을 최대로 수입하기 위해서 왕은 시민들을 감시하고 강제로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 필요해서 바로 왕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군사. 군사와 세금이란 상호관계가 있어서 왕의 독점, 국가의 독점에 기반해 있는 것이 전쟁이다. 왕은 어떻게 전쟁하는 것을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국민한테는 우리가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군사 지원하기 위해서 세금을 수입할 수 밖에 없다. 세금이 필요하다. 이렇게 얘기해서 결과적으로 세금은 평민들을 보호하기위한 돈이라고 얘기해서 세금은 전쟁을 통해서 국민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정당화를 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현대적인 국가의 풀이에 있는 근본같은 원칙이 뭐냐면 전쟁과 세금 둘다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야한다. 세금을 전쟁을 통해서 정당화를 시킬 수 있고 그 다음에 마찬가지로 전쟁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식을 정당화 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서 군주의 독점은 군사와 세금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을 관리하기 위해서 세금을 더많이 수입해야 하니까 세금은 더이상 지역적으로 관리 할 수가 없었따. 예전에는 지역적으로 백작이 직접 자기의 영토에 있는 평민들한테 세금을 받았을 때 직접관리하기가 쉬웠는데(수확의 7프로를 받는등) 그러나 더이상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먼 지역에 있는 왕이 세금을 걷기 위해서는 행정기관이 필요했다. 즉, 관료주의의 필요성 이 대두했다. 그것은 중세시대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17세기 부터는 프 랑스가 전체적으로 군주의 영토가 되어서 아래에 있는 백작들은 딱히 관리할게 없었다. 이런 세금을 걷기 위해서 행정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공공기관의 탄 생.

    왕과 평민사이의 행정기구의 탄생이다. 점점 현대적인 국가를 지역적으로 직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게 아니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행정적으로 관리해야하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는 17 18세기에는 산업적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점점 종교전쟁을 통해서 종교와 권력의 정치분립이 현실화 되었다.

    즉, 왕의 권력이 더 강화 되었다고 보면 된다. 국가에는 점점 더 중요해 지는 것이 뭐냐면 자본, 세금 , 산업적 제본, 전쟁, 독점화, 중앙집권화 였다. 이런 현대적인 국가를 보면 어떤 성향이 있냐면 바로 제도화 systemastation 이었다. 점점 이런 나라의 여러가지 분야들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행정기관들이 조금조금씩 자치적으로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이런 계열들은 위계같은 것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국가의 자치적인 존재가 되고 민간사회가 국가와 분리되는 것이다. 평민들이 국가와의 관계가 이런 큰 분리가 되어서 국가라는 것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점점 17세기 부터 현대적인 국가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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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전쟁, 옛날 천주교 방식을 반대하는 사람들. 천주교보다 단순하고 성실한 종교를 원해서 개신교 신자들이 원했던 것은 쓸데없는 사치 예를들면, 금장식 이나 스테인드 글라스 교회가 필요없다고 생각되어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공관이니까 꾸밀것 없이 소박하게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했따. 개신교의 교회들을 보면 장식이 아주 간단하다. 이것은 puritaniseme 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한 종교를 위해서 순수한 성실한 행동, 윤리 가치가 있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된닥 생각했다. 물론 로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종교 개혁 -  그때부터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 반 종교 개혁 때문에 여기저기 갈등이 발발하기 시작함, 이런 갈등들은 내란 내전이 되었고 종교 전쟁으로 이끌었다. 보통 s가 붙어있는데 온 유럽에서는 여러나라에서 동시에 여러번 일어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을 위그노 라고 불렀다. 이 지역에서는 큰 전투들이 생겨서 아주 폭력적인 내란이 생겨서 온 나라가 혼돈스러웠다. 원래 프랑스 왕족은 바로 기독교, 천주교 이다. 프랑스는 로마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물론 프랑스왕들이 카톨릭 등 천주교를 지지했다. 

      프랑스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프랑스에서는 하루하루의 성인들을 위한 축일이 있다. 그날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이었다. 왕의 엄마는 카트린 드 메디씨 였다. 원래 이탈리 출신 공주였는데 프랑스에 와서 앙리 2세와 결혼하여 아들3명 딸 3명 낳고 아들3명은 전부 왕이 되었다. 딸은 다른지방의 왕자와 결혼해서 왕자가 나중에 까트린드 메디씨의 아들들이 다 죽어서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그사람이 앙리 4세이다. 앙리4세가 왕이되기 전에 나바르지방을 다스렸다. 이사람은 나중에 까트린드 메디씨와 앙리2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한다. 별명은 마르고. 마르고와 앙리드나바르의 결혼식이었다. 마르그리트는 프로테스탄트 이고 앙리드나바르는 천주교여서 다른 종교의 결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카트린드 메디씨는 프랑스에 권력이 있었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이날은 1598년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은 학살로 기록되어있다. 샤를 9세가 왕이었고 어머니였던 카트린드 메디씨는 밤부터 파리와 지방에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만명이 학살되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금은 설명할 수 없지만 시간이 되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  학살 때문에 프랑스 종교전쟁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이 전쟁들이 과도했다고 생각되어서 한꺼번에 몇천명이 죽어서 사실은 프랑스인에게는 충격적인 행사였따. 개신교 뿐만 아니라 모든사람들에게 충격적인 행사였다. 

       그떄부터 종교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때부터 평화롭게 살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 떄뿌터는 프랑쓰 쫑꾜쩐쩅뜰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따. 1598년에 칙령을 지시했다. 이 칙령이 뭐냐면 프랑스에서는 종교의 자유, 특히 아직은 이슬람이나 불교같은 종교들이 없어서 기독교의 여러가지 교파들이 예를들면 천주교, 프로테스탄트같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수 있는 법이 있었따. 

       사실 그 이후에도 조그만 지역적인 갈등이 여기 저기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는 끝났지만 유럽에서는 계속해서 생겼다. 유럽에서는 그 시대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 뭐였냐면 그건 30년의 전쟁이다. 그건 다음세기에 일어났던 전쟁이다. 대충 지도를 보면 노랑색으로 되어있는 것은 카톨릭 천주교 나라들이다. 이런 별 표시가 있는 것은 유태인들이 있는 나라들이고 분홍색으로 되어있는 것은 대부분 다 프로테스탄트이다.

      녹색은 오스만제국이고 이슬람교 사람들이었따. 빨간색은 30년 전쟁의 지역이었다. 프랑스 역대의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오스트리아 독일 같은 지역이다. 

      1492년부터 크리스토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발견 후 여러번 아메리카에 갔다. 

      자크카르티에 캐나다에 있는 생로랑이라는 강을 따라가서 캐나다를 처음으로 탐험했다. 이 새로운 영토를 프랑스 왕을 위해서 정복하였다. 그 때부터 캐나다 북부 지방에서는 퀘백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생겼다. 물론 세계지도가 그 때부터 변하기 시작하고 더이상 유럽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발견하고 그 때부터 새로운 차이가 많은 다른 문화권을 발견해서 아까 몬타뉴를 발견했을 때 얘기했듯이 점점 유럽사람들이 조금더 상대적인 사상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습관 문화 언어 이런것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이런 대발견 시대가 물론 문화 지식 과학 등 여러분야에 큰 영향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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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서 인쇄기술이 발달해서 기술을 많이 전파했다. 그래서 15세기 말부터 책의 생산이 많아졌다.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책 구매가 가능하였다. 그 때부터는 좀 더 보편적인 비평사상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기술을 발명하는 것보다 1439년에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명망을 통해서 서유럽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읽을 수 없었던 그리스와 옛날 서문들을 얻어서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과학자들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즉 휴머니즘은 옛날식 로마니즘의 부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성주의의 중심 그리고 이성을 통해서 현대적인 과학(베이컨,갈릴레오 등의 발견)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것은 종교적인 관념들을 약화 시켰다. 완벽한 인간은 전체적으로 몸과 정신까지 포함해서 잘 개발 해야한다. 그때부터는 개인의 발달, 즉 자기개발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라블레 - 원래 의사였다, 몽펠리에 쪽에 살았는데 의사를 하면서 여러 소설들을 썼다. 이런 소설들은 아주 독특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장르들을 만들었다. 유토피아 일반적인소설 코메디 여러가지 소설 등의 여러가지 장르들을 섞어서 통합적인 소설들을 썼다. 이런책들 속에 라블베는 자기의 가치관을 다 표현했다. 라블레의 사회평등에 대한 의견 등등 그런것들을 자기의 소설을 포함해서 표현했다. 처음으로 프랑스문학에서는 이 소설들을 통해 현실(리얼리즘)을 느낄 수 있다. 일상생활의 냄새까지 느낄 수 있는 특징. 라틴어로 쓰지 않고 

        *대부분작가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롱사르 - 프랑스어를 문학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함. 그래서 시를 프랑스어로 쓰기 시작함. (롱사르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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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즘 - 문학, 건축,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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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3년 프랑스 - 100년 전쟁이 끝난 후 오렌지 색 땅은 프랑스 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다. 아직 통합되지 않은 지역은 브르타뉴이다. 서북 지역을 보면 아직도 독립된 공작의 공국이 있다. 몇 년 후에 프랑스 왕실에 재산이 되지만 아직 1453년에는 독립적인 지역이다. 전쟁 후에 프랑스 왕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프랑스는 국가로써는 조금조금 씩 통합되었다. 왕 아래의 공작,백작의 힘이 많이 감소되었다. 1590년대 유럽의 모습을 보면 1453년에 백년의 전쟁 뿐 만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원래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는데 이 지역에 있었던 Turc사람들이 큰 제국을 만들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서 동로마시대에 종말이 왔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지식인들이 전부 그리스를 통해서 이탈리아에 일부가 갔고 나머지는 동유럽을 통해서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으로 갔다. 그곳은 르네상스의 시작에 아주 중요한 기원이 된 요인이다. 녹색으로 되어있는 부분은 159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지도이다. 이제국은 보다시피 매우커졌다.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왕국에 큰 위협이 된 이슬람 국가이다. 

            1592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15세기 부터는 봉건영주와 봉신 관계가 많이 변했다. 더이상 실제로 중요한 관계가 아니고 혁신적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봉건제도의 시대는 중세시대이고 중세시대가 끝나고 15세기말부터 18세기 말 까지는  Ancien regime(구체제)가 된다.  이 시대는 아직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 전 시대이다. 이때부터는 농노들이 없어지고 중세시대의 3신분 - > 3계급으로 바뀜. 

            귀족(아직도 왕정이니까 귀족은 존재), 성직자, 제3계급(평민) 

            여러가지 측면에 있어서 중앙집권화가 다 되었다. 그래서 중세시대와 큰 차이가 있다. 중세시대 프랑스 지도를 보면 프랑스 영토의 큰 분리들이 있었다. 공작,백작,왕의 영토가 전부 따로따로 있었다. 그러나 15 16세기 부터는 프랑스의 주요 유일한 군주는 바로 왕이었다. 15세기가 끝나면 시작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전쟁들"이다.

            왕 1명이 한 것이 아니라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이렇게 프랑스와 전쟁을 했다. 보통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는 이탈리아 보다 한 백년 정도 늦게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문예,회화,예술분야들이 프랑스보다 일찍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 이탈리아 문화들을 접하면서 생활방식, 건축양식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무조건 전쟁을 통해서 배웠다고만은 볼 수 없고 그 시대에는 이미 유럽내에서 교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경로로로도 배웠을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이 프랑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옛날식 건물들을 재발견해서 왕들이 사용하는 건물의 모습이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회화에서는 유명한 화가들이 많아서 이 새로운 르네상스 스타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얘기하면 이탈리아의 전쟁들은 프랑스의 르네상스시대 기원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르네상스를 탄생하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었다.

            옛날의 중요한 텍스트들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유럽에서는 큰영향이 있었다. 봉건제도가 없어지고 대신에 조금조금씩 여러 군주들이 지역적으로 직접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는 것 보다는 조금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군주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보면 이런사람들이 자본이 있어서 자기 권력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문화예술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봉건제도가 없어지고 중앙집권화가 발생하고 그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지식인들이 옛날 없어졌던 로마시대의 유물을 다시 가져다 주고 재발견하게 하는 역할이 있었고, 다른말로 얘기하면 이 시대는 로마시대의 가치관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딱 15세기부터는 사람들이 로마시대의 유적지들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로마시대의 유명한 네로황제의 집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 숨어있었던 네로황제의 멋있는 황금궁을 발견해보니까 안에 그림들과 특히 조각들이 있었다. 그 때 로마에서 살았던 미켈란젤로라는 예술가가 직접 로마시대의 멋진 조각들을 보면서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로마시대의 예술양식들을 재발견하면서 다시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13,14세기부터는 점점 새로운 개성화 아니면 개인화가 되었다. 이 14,15세기는 개인의 탄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더이상 사회의 중심은 종교가 아니다. 신도 아니고 집단도 아니고 개인이 그때까지 종교가 사용했던 자리를 대신해서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이 새로운 인간에 집중하는 것은 Humanisme 휴마니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간중심주의 아니면 인간주의. 인문주의는 인문학, 문화에서 따오는 경향이다. 인문주의는 르네상스시대의 새로운 경향이다. 문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태도 + 개성화된 개인의 새로운 지위 를 인정하는 시대.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어떤것이냐면, 전통교육에 대한 거부이다. 전통교육이란 중세시대에는 대부분 교수들이 성직자들이었다. 이런 성직자들이 직접 학생에게 가르치고 제일 중요한 학문이 뭐냐면 신학이었다.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논리도 공부하고 아주 고전적인 학문들을 공부했던 것이고 물론 지식의 내용은 종교인들이 가르치니까 물론 성경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런 라틴말로 된 교육은 16세기 되면 더이상 시대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수아 1세같은 왕은 성직자들이 프랑스에서는 교육분야에서는 권력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더이상 고정된 지식을 대학교에서 가르치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물론 소르본이라는 대학교는 성직자들이 운영하니까 해체 할 수는 없었다. 프랑수아1세가 결정했던것이 뭐냐면 소르본대학교 바로 옆에 새로운 대학교를 만들었다(college de France - 꼴레즈 로얄, 프랑스 최고의 대학교이며 교수끼리 위원회를 만들어서 새로운 교수를 선출하고 매년 새로운 과목을 가르쳐야하고 이 학교의 특징은 학생들이 특별히 신청할 필요가 없고 누구나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대학교 이다.) 파리에 가면 소르본 대학교가 있고 길건너에 꼴레즈 프랑스가 있다.

            유럽에서 16세기의 중요한 혁신중 하나는 인쇄기술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폰트라는 글씨체가 발달하였다(Garamond_글씨체 종류) 

            교육관련된 것은 자료 참고문헌 관련된 도서 가 중요하니까 인쇄기술이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고 고대언어를 그때부터 배울 수 있었다. 몇세기동안 자료가 없어서 서유럽 사람들이 라틴어를 읽을 줄 알앗는데 그리스 텍스트가 많이 없어져서 그리스말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리스텍스트를 읽을 수 없었다. 그다음 히브루어. 히브루어는 성경의 언어인데 이 시대에는 종교가 아직 중요한 것인데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없으면 문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성경을 읽고 해설하는 사람들이 라틴어의 성경을 읽고 해설했다. 그래서 직접 오리지날 텍스트를 보며 해석해야했다. 그다음은 고전문화의 부흥이었고 점점 이 고전문화의 부흥은 새로운 것이 추가 되었다. 16세기부터는 현대과학의 탄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점점 이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다. 현대적인 과학의 원칙을 정의하기 위해서 16세기 과학자들이 점점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논리,합의 등의 이성적인 과정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중세시대 독단주의를 반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16세기 부흥이라는 시대는 정신적인 것 뿐만아니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완전 혁신적인 관점이었다. 그래서 완벽한 인간은 그냥 똑똑하고 교양도 많고 그런 인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사람이 몸도 건강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중세시대의 특징은 약간 육체적인 차원을 무시했던 시대였다. 육체는 특히 카톨릭이나 기독교 종교에 있어서 죄와 관련된 차원이라고 보아서 육체의 몸은 성욕과 관련된 것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강한 몸을 인정해야한다고 그래서 이 아주 유명한 라틴말로 되어있는 문서가 있는데 '멘사나 인 꼬르포레 사노' =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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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 (Guerre de cent ans) 영국-프랑스 전쟁

              15세기 초 상황을 보면 오른쪽의 지도를 보면 된다. 1429년은 백년전쟁의 한 가운데의 시기이다. 녹색의 지도는 다 영국땅들이다.부르고뉴가 지배하는 지역은 분홍색. 오렌지색 브르타뉴는 왕의 땅이 아니다. 강한 공작의 지역이다. 부르고뉴는 영국왕과 협력해서 전쟁했다.

              잔다르크는 프랑스 군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거의 패배했던 상황이었는데 사기를 많이 잃은 프랑스군이 신이 직접보내주신 처녀를 보고 용기를 얻어서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샤흘르7세의 시대였다. 그 때부터 전쟁이 또 시작됐는데 프랑스 왕들이 이길 수 없엇다. 잔다르크는 체포되서 죽었지만, 그 이후 20년 뒤에 100년 전쟁이 종말한다. (Castillon 전투)

              Bataille de Castillon 에서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영국왕들은 물러갔다. 상징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중세시대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00년 전쟁을 끝으로 프랑스왕들은 그 때부터 프랑스의 중앙 집권화를 완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프랑스 왕들이 잃어버렸던 권력을 다시 받아서 회복하고 프랑스를 직접 전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상황이 생겼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어서 15세기 서유럽사회들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아까 문화적인 차원에 대해서 있었는데 발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발견시대.

              (중요!)1492년부터 아메리카 발견 ( 큰변화와 식민지시대) (중요!)1453년은 100년 전쟁의 종말 뿐 아니라 지중해 동쪽에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가 동로마제국이었는데 이 제국이 Turc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면서 동로마제국이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제국은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로마시대의 마지막 지역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로마시대의 옛날 저서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서유럽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고대 그리스어를 직접 배울 수 있었따. 그리고 성경을 잘 해석하기 위해서 히브루어를 읽을 수 있는 학자들도 있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옛날 로마제국 시대의 문명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지중해 동쪽에 있어서 서구유럽과 좀 멀리 있었고 서구 유럽과 큰 교류가 없었는데

              갑자기 1453년 되면 이슬람교를 지지하는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동로마의 지식인들이 서유럽으로 도망갔다. 이사람들은 대부분 큰 대학교가 있는 나라들로 갔다. 옛날 문서와 옛날 저서들을 가지고 이탈리 북부 프랑스 그리고 일부는 네덜란드 중심으로 가서 로마시대 부터 서유럽에서 점점 없어졌던 옛날 문화들을 가지고 도입했다. (르네상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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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7년 (위그카페)

                지도를 보면 녹색으로 표시 된 지역은 프랑스다. 

                연한녹색은 왕의재산. (왕실의 재산)(직접프랑스왕이 관리하는땅)

                 왕이 소유하는 지역은 아주 적다. 나머지는 왕 아래에 있는 봉신, 브르타뉴 같은 경우는 원래 백작의 지역이다.

                 노르망디는 공작의 지역이다. 

                아키텐지역 또한 공작의 지역이다. 

                오렌지색은 버건디,스위스,프로방스 인데 이 때는 왕국이었다.

                백작이나 공작들이 큰 강을 가지니까 왕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다. 돈이 있으면 아래에 있는 봉신이 더 많고 기사들도 많고 더 강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왕의 지위가 불편했다. 공식적으로는 왕이지만 실제로는 왕보다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권력도 많고 부도 많았다. 그 시대에 있는 일본의 '나라'라는 지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중앙집권화는 12세기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중앙집권화가 완료되는 시기는 17세기까지 기다려야한다(루이14세)

                루이14세가 프랑스의 정치,문화,경제 분야에서 중앙집권화를 완료시켰다. 그리고 100년 후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이 중앙집권화를 완료시켰다. 거의 500년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된다. 

                필립 오귀스트 부터는 전쟁과 여러가지 결혼관계를 통해서(결혼하면 나중에 와이프가 상속했던 땅을 받아서 왕실에 포함할 수 있다)

                분홍색 지도의 땅은 왕실의 땅이 된 것이다.  연두색 땅은 왕의 땅이었는데 왕의 딸이 물려받았는데 나중에 영국왕과 결혼해서 영국왕의 땅이 되었다. 그것은 100년 전쟁의 기원이 되었다. 

                프랑스는 퍼즐같은 형태이다. 어제 우리가 12,13세기부터 고딕양식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한다고 얘기 했을 때 건축양식만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문화적인 평화가 시작된다고 이야기 했다. 사람들이 신과의 관계는 더 깊어진다고 얘기했고, 전체적으로 기독교와의 관계가 많이 변하고 있다고 얘기 했다. 그것은 전체적인 중세시대의 사회의 변화이다. 12,13세기 부터는 서유럽에서 시작된 새로운 문화적인 경향이 뭐냐면 

                개인의 등장이다. 아니면 현대적인 주체이다. the modern subject/ modern individual 이 발생

                바로 12,13세기부터 조금씩 근대화가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시작된 것이라서 우선은 예술에서 먼저 볼 수 있다. 그리고 아까 얘기 했듯이 건축의 양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평민들은 많이 변화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변화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현실적인 리얼리스틱한 초상화가 나타났다.

                14,15세기 까지 그렸던 그림들은 대부분 이상적인 그림들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보다는 왕같은 그림이면 이상적인 왕, 완벽하게 생겼던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아직은 중세시대 초반 예술은 현대성이 없었다. 14,15세기 부터는 실제 초상화가 생길 때 부터는 회화, 작가들은 현실을 보면서 현실을 그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시다 시피 조선예술사를 보면 마찬가지로 15,16세기 부터는 새로운 회화양식이 발생한다. 실경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더이상 이상적인 산수화를 그리는 것보다 실제로 현실에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과 비교하면 좋다. 그때부터는 모든 사회들이 변화한다고 볼 수 있다. 도시의 부르주아 사람들이 여러사회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니까 그사람들을의 가치관을 잘 반영하는 예술이 등장했다. 그런 사람들이 자본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이상 이상적인 귀족계층의 가치관을 보고 싶은게 아니라 조금조금씩 이 새로운 계층이 자기가 직접경험하는 여러가지 자원을 직접 예술로 보고싶어하는 욕망이 생겨서 점점 예술도 바뀌고 사회도 바뀌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은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몇백년 걸릴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고딕양식과 관련해서 길게 얘기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 때 부터 특히 서양에서 개성화 individulalisation 이 시작된다고 볼 수있다. 예수의 유골과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든 교회를 어떤 모습인지 보기 위해서 이 동영상을 같이 보면 되겠다. 

                중요) 스테인드글라스, 생트샤펠르(파리에 있는 10대성, 세느강 가운데에 있는 성, 프랑스왕의 첫번쨰 궁궐이 있었고 이 왕궁이 옛날에 루브르로 이동 했을 때 감옥이됬다. 나머지는 프랑스의 대법원)

                보다시피 이런 건물에서는 높은 건물이고 벽의 기둥들은 어떤 기능이 있냐면 큰 창문들을 만들기 위한 기둥들이다 구조는 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기둥들은 큰 유리창을 만들기 위한 구조의 기둥이다. 성경을 읽으면 확실히 신은 빛이다 빛은 성스러운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조그만 그림들은 예수의 그리고 성경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면 스토리텔링이 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평민이라도 성경에서 나오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여기 교회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들이 대부분 13세기의 것들이다.

                이 교회가 사실은 작은 것이지만, 파리에 가면 꼭 방문해야 한다. 너무 멋있는 조그만 보물 같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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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비스의 아버지 - 메로빙거

                  7세기 때는 샤흘르 마를텔 이라는 사람이 군재라고 왕 왕대신 총리역할 이사람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전투를 했다. 732년에. 이 푸아티에 전투는 프랑스 북부로 올라오고 있던 아랍사람들의 침략을 막은 것이다. 그 때는 8세기였는데 8세기 같은 경우에는 더 이상 비지고트 왕국은 없다.

                  비지고트 왕국은 몇년 동안 있었지만 나중에 아랍사람들은 아프리카 북부로 가서 스페인으로 들어가서 스페인을 정복해서 스페인에서 정착했다. 그 때 아랍사람들은 새로 생겼던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새로운 이슬람교를 전파시키기 위해서 피레녜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했는데 빠리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파리수도에서 나온 샤흘르 마르텔이라는 총리의 군대와 싸워서 결과적으로 샤흘르 마르텔이 승리하고 나중에 이사람의 이름을 따서 카럴링거 왕조가 시작했다. 

                  몇년 후에 아주 유명한 Charlemagne 이 통치했다. 한국어로는 카롤루스 대제이다.740년과 742년 사이에 태어났고 814년에 사망했다. 그사람은 800년에 황제가 되었고, 새로운 제국을 설립했다. 이 새로운 제국의 이름은 서로마 제국이다. 400년 전에 없어졌던 서로마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의도 였다.

                  프랑크 왕들이 다 기독교 왕들이니까 신성로마제국이다(800년)(중요!)

                  카롤루스 왕은 독일왕이라고도하고 프랑스왕 이라고도 한다.그래서 게르만족 문화권 관련된 요소들도 많다. 그러나 갈로로마 영토 정복해가지고 옛날에 갈로로마였던 지역에서 살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프랑크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점점 프랑크 문화와 그 지역의 원래 있었던 문화는 조금씩 통합하게 되었고 언어들도 혼합되었고 8-9세기 쯤 프랑크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 골어 프랑크어가 섞인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까롤루스 대제는 프랑스왕도 아니고 독일왕도 아니고 게르만 출신의 카롤망고 왕국의 왕이다.

                  오렌지색 지도는 카롤루스대제의 제국이고 녹색은 앵글로색슨 제국이고 갈색은 아랍제국이었다. 붉은색은 원래 기독교 스페인의 지역. 노란색은 동로마제국. 까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아주 큰 편이었다. 그 제국의 수도가 파리가 아니라 원래 아헨? 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수도원의 문화적 기능을 강조했다. 수도원은 교육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대학교 개념

                  그래서 옛날 문화와 문서들을 보면서 교육도하고 그 뿐만 아니라 중세시대의 수도사들은 침략시대에는 여러전투들이 많아서 제일먼저 할 수없는게 농사이다. 그래서 농사는 제일 필요한 것만 한다. 그 때는 몇백년 동안 없어진게 식물의 다양성이다. 그래서 수도원에 있는 텃밭의 역할이 중요했다. 

                  까롤루스대제가 사망 후 그의 손자 3명이 싸워서 3지역으로 나눴다.  (오른쪽 지도)

                  그때 부터는 서로마 제국은 신성 서로마 제국이라고 부르고 여기있는 것은 3가지  왕국으로 분리 되었다.

                  - 녹색은 lotaire라는 손자가 통치하는 왕국.(독일,버건디,이탈리아 북부)

                  - 분홍색은 charles le chauve가 통치 (프랑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중세시대 후반 현대시대의 유럽의 새로운 모습이 조금조금씩 구성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서로마 제국은 3가지 왕국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제국은 없어지지 않고 원래 녹색으로 되어있는 부분은 신성서로마제국이라 불린다. 즉 신성 서로마제국은 없어지지 않는다. 분홍색은 제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점점 이 왕국은 프랑스가 된다.

                  중세시대에는 봉건제도가 시작했다. 맨위는 봉건군주 그 밑은 귀족들로 구성된 봉신이다. 위에있는 사람들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주고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아래에는 서민들이 있다, 서민들 중에는 성직자가 있다. 성직자는 여러가지 권리가 있어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수있다. 나머지는 대부분 농민들이다. 이런 평민 외에는 거의 노예라고 생각 되는 사람들도 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윗사람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렇게 서로 위계시스템 내에서 서로 주고받는것을 봉건제도라고 하며 피라미드 형태이다.  성직자,귀족 그리고 나머지 평민과 농노가 있다. 

                  다음왕조는 카페티안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프랑스라고 부를 수 있다. 843년 이후 부터는 프랑크 왕국은 더이상 프랑크 라고 하지 않고 지금 부터는 프랑스라고 한다. 987년은 보통 10세기 말이고 10세기 부터는 변화가 일어난다, 스칸디나비아등의 북부지방민족들이 서유럽에 계속해서 침략했다. 바이킹사람들이 북부지방에 정착해서 프랑스사회에 통합되기시작했다. 언어나 습관등등. 이 지역은 그 사람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북부에서 왔으니까 노르망디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바이킹들이 온 후로는 유럽에서 큰 침략이 없었고 평화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10세기 부터는 문화와 예술이 발전될 수 있었다. 먼저 10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것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상이었다. 

                  로마네스크는 로마시대와 비슷한 양식이고 원래 건축으로 부터 볼 수 있었던 새로운 문화 경향이다. 유럽남부에서 시작했는데 스페인과 피레녜에서 시작하였고 점점 프랑스 북부로 이동했다. 이 문화 경영은 건물로 많이 표현되었다. 어떤 건물이냐면 대부분 그 시대의 중요한 건물들은 교회와 성당들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부터는 나무로 만든 교회들은 튼튼하게 돌로 로마네스크 방식으로 만들었다. 로마시대 건축기술을 사용해서 만든 건물들은 튼튼하지만 높게 지을수 없고 큰 창문을 만들수 없어서 어두운편이다.

                  거의 200년 이후에는 12, 13세기 부터는 이번에는 프랑스 남부가 아니라 파리지방에서 시작한 새로운 문화 경향이 뭐냐면 고딕양식이었다. 건물들을 조금 더 크고 높이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건축 기법을 만들었다. 옆에 기둥을 만들면 더 높히 지을 수 있었다. 왜 고딕양식이라고 부르냐면 파리지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지으면 로마네스크 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한테는 이상한 방식으로 여겨져서 이것은 오랑캐들이 사용하는 양식이라고 부르기 위해서 고트 민족이름을 사용했다. 

                  루이 9세가 십자군 전쟁을 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돌아와서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동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예수와 관련된 유물을 몇가지 구분했다. 예수의 가시관의 유물 일부 그리고 예수와 관련된 것들을 가져와서 이런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제일 멋있는 교회를 만들었다. 이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어서 그때는 드물고 매우 비싼 유리를 활용했다. 교회는 로마네스크 방식으로 만들 수 없었던 큰 유리를 고딕양식때는 가능하게 했다, 큰 창문 때문에 빛이 많이 들어오고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사용해서 색깔있는 유리 들이 매우 이쁘다.

                  이런 새로운 교회와 성당을 통해서 일반적인 신자들이 사실은 이런 교회에서는 새로운 신을 만날 수 있었다. 신은 유일한데 프랑스나 유럽에 가서 로마네스크 교회를 보면 조용하고 시원하고 어둡고 기도하려면 잘 집중 할 수 있는데 이런곳에서는 신과의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딕양식에서는 빛이 많이 들어오니까 하나님의 권력과 훌륭한 힘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중세시대에는 색깔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쉽지 않았다. 옷은 염색하기 위해서 다양한 색깔들이 있던 것이 아니다. 부자들만 색깔옷을 입을 수 있었다. 12,13세기 부터는 개인화 되는 시대이다. 신과 개인의 관계가 많이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기독교 종교를 접근하려면 예배는 라틴말로 했다. 그래서 위계질서가 심했다. 성직자들은 종교와 관련된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과 신들을 만나고 싶으면 성직자를 통해서 해야했다. 직접 신한테 기도하고 부탁하는 것은 어려운 편이었다. 점점 이로운 새로운 성당에서는 신과의 관계가 변화할 수 있었다. 

                  고딕양식은 돌로만들어진 책 돌로만들어진 양식이다. 교육을 잘 못받은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들도 교회에가서 직접 배울 수 있고 직접 기도하면서 멋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비치는 여러가지 색깔들의 빛을 받으며 정신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13세기 부터는 중세시대에 가치관이 점점 바뀌고 있다. 사고방식도 바뀌고 도시들도 개발되기 시작한다. 점점 중산층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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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은 라틴어로 갈리아 라고한다. 골사람은 라틴어로 Gallus 라고 한다. 또한 Gallus라는 것은 수탉이라는 의미가 있다. 골 부족들의 분포 : 켈타/아키타니/벨가 노란색 땅은 이탈리아 로마의 식민지였다. 점점 로마사람들이 골족 영토로 가깝게 정착하고 싸우기 시작 했을 때 부터는 골 사람들이 자신들도 도시같은 것을 건설해야한다고 이해했다. 특히 성, 요새화된 성같은 것을 만들어야 된다고 이해했다. 줄리어스 시자 장군이 기원전 56년부터 골전쟁을 시작했을 때 부터는 시자의 부대들이 얼마나 빨리 골을 정복하는걸 보니까 골사람들 더이상 따로따로 농장에서 살면안되고 모아서 큰 도시나 성같은 도시에서 살아야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하기 위해서 연맹을 맺어서 다같이 싸워야 된다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 국가가 없었던 골족에서 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부터 생기는 것이 뭐냐면 오피둠이라는 말이 생겼다. 오피둠은 성이라는 뜻이고 원래 도시나 성이 없었던 골족사람들이 다른방식으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골 전쟁 때문에 골족의 문화가 완전히 변화했다. 기원전 52년에는 골사람들의 수도였던 알레시아전투에서는 골사람들이 패배했다. 이 전투로 골 전체적으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사실은 골전쟁은 52년에 딱 끝내는것이 아니라 완전히 골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시자장군은 전쟁을 좀 더 해야했다. 51년에 끝났다. 51년 부터는 골이라는 문화가 없어지고 시작되는 새로운 문화와 시대가 골+로마 시대이다. 이 새로운 갈로 로마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로마제국에 소속되어있다. 첫번째 로마 황제의 사망이후의 도시이다. 첫번째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이다. 줄리우스 시자의 조카이다. 줄리우스 시자는 절대로마의 황제가 아니었다. 서기 14년에 아우구스 투스 사망했을 때 로마 제국의 모습은 딱 그거였다. 로마제국은 아주 큰 편이었다. 지중해 주변에 모든 나라들을 다 포함하였다. 영국에서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집트까지 시리아 이라크 일부 까지 포함. 골은 그저 일부일 뿐이었다. 리옹은 원래 골 외의 수도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로마시대의 로마식 평화시대이다.(Pax Romana)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여러가지 분야에서 발달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그것 때문에 골족들도 팍스로마나 시대에 많이 발전했다. 파리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로마양식과 건물들을 많이 만들었다(큰 광장과 시장 대중목욕탕 경기장 등등) Asterix - 골족을 모델로 한 만화의 주인공 Obelix - 아스테릭스의 친구 로마평화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4세기 부터는 유럽북부와 동부에서 여러가지 이동하는 침략민족들이 남부로 가서 로마제국을 정복했다. 이 새로운 시대는 보통 침략시대라고 부른다. 침략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서 요새는 grandes migrations(침략민족의 대 이동)이라고 부른다. 경제적인 이유관련해서 원래 있던 곳에서 살 수 없었고 다른곳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서기 100년 부터 500년 까지 서부와 남부에서 온 민족들을 볼 수 있다. 훈,비지고트,반달족 등등 대부분 독일과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쪽에서 온 게르만 민족들이었고나머지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터키,몽골 쪽 훈이었다. 서로마제국멸망은 476년이며 이것은 중세시대의 시작이다. 대 이동은 제국멸망 100년 전인 376년이라고 보면 된다. 376년부터 시작했던 것은 고트사람들의 침략이다. 고트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와 독일과 폴란드 북부에 있었는데 아직은 이유를 알수 없지만 동부로 갔다. 그리고 고트라는 민족은 두갈래 두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로마까지 갔다. 일부는 서부로 갔다. 비지고트 사람들이 먼저 로마가서 로마를 약탈했던 것은 410년 이었다. 410년이라는 연도는 그 사건은 아주 중요한 것이 었다. 첫번째 로마의 약탈 원래 이 큰 로마제국의 수도는 문화가 없다고 거의 유목민같은 문화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민족이 로마에 와서 로마를 약탈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큰 충격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455년에 반달족은 독일에서 와서 프랑스 스페인을 통해서 지금은 튀니지 지역에정착해서 여러방향으로 지중해 쪽에가서 또 약탈했다. 또 로마에 가서 이번에는 완벽히 약탈했다. 로마의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더이상 로마는 로마의 수도로 사용할 수 없었다. 몇년 후에 이탈리아 반도로 넘어가서 이번에는 오스트로고트족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로마와 전투했을 때 오스트로 고트족들이 승리해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 더이상 로마에는 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황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대신에 오스트로고트족이 새로운 왕국을 건국 했다.로마말고 이탈리아를. 비지고트사람들은 그동안 프랑스남부와 스페인에 정착햇다. 476년 이후에는 여기저기 새로운 왕국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로마관련된 영토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들이 있다. 프랑스 북부에서는 로마제국과 연결된 조그만 왕국같은 지역이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서로마 제국은 아무리 476년에 멸망했지만 동로마제국이 따로 있었고 그대로 유지했다. (중요!) 동로마 제국을 보면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이집트 중동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등등 포함.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는데 현재에는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1453년까지 동로마제국은 이어졌다. 노란색은 비지고트가 건국한 왕국, 연두색은 또다른 이동 민족 버건디파란색은 게르만족. 이동하는 것과 관련된 부족은 게르만족 전체를 보면 하나는 프랑크라는 부족이있었다. 큰 왕국도 아니고 통일된 왕국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여러지도자들이 있었는데 클로비스는 466년부터 프랑크족을 통일 시키고 프랑크족의 첫 왕이 되었다. 프랑크영토에서 클로비스라는 사람은 녹색지역을 정복했다. 486년 전쟁의 승리로 511년 에 현재 프랑스 영토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게르만민족은 나중에 가톨릭개종을 통해서 켈트족과 게르만족 프랑크와 갈루만족들이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중요!) 클로비스는 첫번째 프랑크왕국의 첫번째 왕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역사를 보면 프랑스가 되기 전에 프랑크라는 왕국이었다면,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첫번쨰 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프랑크는 아직 프랑스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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